고대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그 이야기를 해봅시다.

고구려 고분

 

역사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높은 무덤을 고분이라고 부릅니다.무덤안을 장식하기 위해 천정이나 벽에 그린 그림을 고분벽화 라고 합니다.고분벽화는 옛날 사람들들의 그림 실력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의 사상과 종교 생활모습 등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세계적으로 남아있는 고분벽화는 많지 않지만 그중에 고구려와 이집트 이집트벽화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고구려 고분 벽화와 무덤

덕흥리 고분벽화

 

우리나라 고대 무덤중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은 끝에 총을 붙이고 그안에서 출토된 물건이나 벽화의 이름을 붙여서 무덤 이름을 짓습니다.예로  신라의 천마총에서는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안장이 출토되어서 하늘 천 말 마로 천마총 이름이 붙여진것이고 춤을 추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무용총이라고 이름 붙은 고구려 고분도 있습니다.고구려 고분에는 시신과 함께 껴묻거리를 함께 묻고 벽화를 그려 놓았습니다.이 벽화들을 통해서  그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을 했는지?어떤 생활을 했는지 등으 알수 있는것입니다.무용총벽화에서는 사람이 크기가 다르게 그려져 있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신분의 차이에 의해서 크기를 다르게 그렸답니다.계급이 존재하던 사회였기때문에 신분이 높은 사람은 크게 신분이 낮은 사람은 작게 그려서 계급의 높고 낮음을 표현한것입니다.또한 고구려시대의 옷도 알수 있습니다.안악 3호분 벽화를 예로 든다면 부엌으로 보이는 곳에는 사람들이 커다란 솥을 놓고 음식을 하고 있고 차고를 보면 집주인이 타고 다녔을 것 같은 수레도 보입니다.푸줏간 갈고리에 고기들이 걸려 있는 모습도 볼수 있습니다.고구려 사람들도 지금처럼 고기를 걸어놓고 잘라서 먹었고 벽화속에 있는 수레를 타고 아녔구나 하는 생활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수산리 고분 귀부인도를 보면  처음에 있는 부인은 크게 그려져있고 그 뒤에 양산을 받쳐주는 사람은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즉 사람의 크기를 보고 고구려가 신분제 사회였구나를 알수 있습니다.덕흥리 고분벽화에서는 벽에 신화의 세계를 그려 놓았습니다.은하수와 베를 짜는 여자 소를 끄는 남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이름이 견우와 직녀로 불려졌습니다.이 그림에서 부터 고구려는 농사를 지을때 소를  이용했구나도 알 수 있습니다.

왜 죽은 사람의 무덤안에 이런 일상생활의 모습을 그려 넣었을까요 ?이것은 바로 죽은후에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었고 내세에서도 현세의 삶이 그대로 이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바로 영혼이 벽화에 그려진 생활 모습을 보고 그 생활을 이어나갈거라도 생각한것입니다.심지어 천장에 별자리까지 그려놓았던 고분도 있었습니다.  또 지배계급은 살아 있을때 피지배계급 즉 노비를 부리면서 삽니다.그 생활이 사후세계에도 이어진다고 생각해서 지배계급이 죽었을때 살아있는 가족과 노비를 함께 묻는 순장 풍습까지도 있었습니다.고구려왕이 죽었을때 노비들과 후궁,장군을 함께 묻기로 했는데 장군은 사후세계에서도 왕을 지켜준다고 생각한것입니다.5.6세기 이후가 되면 고구려 고분벽화의 그림도 조금 변화하기 시작합니다.일상생활의 모습 대신 불교,도교의 종교적인 상징들이 그려지기 시작합니다.북쪽 방위신 현무,동쪽 방위신 청룡,서쪽 방위신 백호,남쪽 방위신 주작이 그려지면서 그 방위신들이 무덤 주인을 지켜준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면서 순장풍습도 없어졌습니다.

 

이집트 고분 벽화와 무덤

이집트 고분벽화

 

이집트에서도 비슷한 내세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이집트 사람들도 사후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왕의 무덤인 피라미드에 여러 보물들을 묻었던것도 미라를 만들었던 것도 같은 이유랍니다.이집트 사람들이 사람들이  죽으면 영혼이 사람 몸을 떠라서 쉬고 있다가 미이라가 되어 부활하게 되면 영혼이 그 몸 속으로 들어가 산다고 믿었습니다.미래를 만들 때는 왼쪽 옆구리를 조금 갈라서 장기들을 꺼내 카노푸스의 단지에 넣고 심장만 남겨둡니다.천연소금을 시체안에 채우고 40일 동안 건조시킨 후에 물로 잘 닦고 살아 있는 사람처럼 탄력을 살리기 위해 기름도 바릅니다.그리고 장기가 있던 몸안에 톱밥,나무잎,아마천 등으로 채워넣고 붕대로 감는겁니다.파라오왕은 영혼이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마스크를 만들어서 씌였는데 실제 얼굴 모습 그대로로 만들었다고 합니다.유명한 것이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입니다.투탕카멘은 18살 어린 나이에 죽어서 황금마스크에도 앳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묻으면서 사자의 서를 같이 넣어주었는데 사자의 서는 사후 세계를 무사히 통화하기 위한 안내서입니다.사람이 죽으면 자칼의 머리를 한 아누비스가 죽은 자의 영혼을 심판의 저울로 데려갑니다.심판의 저울은 살아있을때 지은 죄의 무게를 재는 저울인데 저울 한쪽에는 죽은 자의 심장을 한쪽에는 정의의 신 마트의 깃털을 올려놓고 잽니다.만약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해서 악엉 머리에 사자갈기를 한 안무트가 그 심장을 먹어버리고 그 영혼은 소멸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리고 이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면 사후 세계의 신인 오시리스 앞으로 가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받아 미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오시리스는 초록색피부를 하고 있고 오른손에는 권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왼손에는 생명을 상징하는  도리깨를 쥐고 있습니다.그러면 이 사후세계에서 영원한 삶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현실세계에서 아주 착하게 지내야 겠습니다.이집트 무덤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세네트라는 보드게임의 일종을 하는 모습,연회를 즐기는 모습,사냥을 하는 모습,죽은 뒤의 사자의 서 그림처럼 심판을 받는 모습 등의 벽화를 통해서 이집트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생활을 했고 사후세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도 알게 됩니다.

 

한참 떨어져 있는 고구려와 이집트인데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거의 비슷합니다. 동양과 서양에서 비슷한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옛날 사람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위로를 이런 방식으로 하였나 봅니다.만약 계급사회에서 지배계층이 아닌 피지배계층이였다면 어떠했을까요? 사후에 대한 선택권도 두려움도 없었을까요? 순장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잔혹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 세계에는  7천개가 넘는 언어들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런 반면에 글자 즉 문자는 몇 십개가 안된다고 합니다.

 

훈민정음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훈민정음

한글은 우리 언어만을 위한 글자입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분은 바로 세종대왕님입니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의 삶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과학적이고도 쉽게 배울 수 있는 훈민정음을 만드신겁니다.훈민정음을 만드는것을 신하들이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비밀스럽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역사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답니다.그래서 훈민정음을 누가 만들었냐를 두고 의견이 나뉜답니다.예전에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함께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알려졌었습니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혼자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합니다.정인지라는 사람이 쓴 훈민정음 서문에도 훈민정음은 우리 임금님께서 친히 만드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답니다.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문자가 사용하기 편한지 실제로 소리를 기록하는데 문제가 없는지  등에 대해서 집현전 학자들에게 연구를 하게 하는데 이때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은 28개의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1446년에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게 됩니다.

훈민정음은 가르칠 훈,백성 민,바를 정,소리 음: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백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자에 담아 말하기를 바랬던 세종대왕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으니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어도 마침내 자기의 뜻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내가 이를 위해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나날이 사용하는데 있어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라고 세종대왕은 분명히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훈민정음의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따 만들었는데 "기역'은 혀뿌리가 목을 막는 모양을 본따서 ,"니은"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을 본따서,"미음"은 입모양을 본따서,"시옷"은 이 모양을 본따서,"이응"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합니다.그리고 여기에 획을 더하는 방법으로 자음을 만들었고 "아 야 어 여" 같은 모음은 "하늘,사람,땅"의 모양을 본따 만드었는데 이 창제 원리는 "훈민정음해례본"에 나와 있답니다.이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되기 전만해도 우리는 훈민정음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했습니다.그래서 창호지를 보고 만들었다고 하기도 하고 외국의 글자를 보고 베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그런데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훈민정음해례본"을 발견하고 잘 보관하신 덕에 우리는 훈민정음이 과학적으로 만드어진 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습니다.

 

세종대왕의 꿈이 가득 담겼던 훈민정음은  그 이후에 어떻게 되였을까요?

 

 세종대왕의 바람대로 홍길동전을 비롯하여 훈민정음을 사용한 책이 나타났고 백성들도 훈민정음을 사용하게 됩니다.그러나 양반들은 훈민정음을 수준 낮은 글자라고 하며 무시했습니다.자신들은 어려운 한문을 통해 유교 성리학을 공부하는 높은 지식을 가진 양반이고 훈민정음은 아래 신분의  백성들이나 사용하는 천한 글자라고 생각했답니다.그래서 훈민정음을 언문,암글 이라고 낮춰 불렀답니다.

훈민정음의 가치가 제대로 빛이 발했을때는 바로 일본이 우리 나라를 지배하던 일제강점기였습니다.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셨지만 언문,암글로 낮춰 사용되었고 각지역별로 다르게 사용되다 보니 소리나는 대로 쓰거나 표기와 뛰어쓰기가 맞지 않았습니다.통일된 맞춤법이 없었답니다.

이에 국어연구가였던 주시경 선생님이 나서시게 되였습니다."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게 하고 뜻이 통하는 사람끼리 모여 하나가 되고 그 하나가 모여 나라를 이루게 되니 곧 말은 나라를 이루게 하는 것이고 우리의 말과 글을 제대로 지켜야 우리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있다 "라고 생각하신겁니다.그리고 훈민정음에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한글에서 "한" 은 "크다 "라는 뜻입니다,그래서 "우리 민족의 큰 글자"라는 의미;"한 민족이 사용하는 글자 "라는 의미로 한글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주시경 선생님은 모든 사람들이 한글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문법과 맞춤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그래서 한글 문법을 체계적으로 정비해서 국어문법이라는 책을 쓰시고 국어사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주시경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조선어학회의 동료들이 그 뜻을 이어받아 한글을 연구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지금의 한글날인 가갸날을 만들고 우리말큰사전을 완성하는 일 등을 했습니다.그런데 그때는 일본이 우리 나라를 지배하던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일본은 한글의 보급과 우리말사전을 만드는 것을 방해했습니다.당시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서" 조선인이라는 의식을 지워라" 라는 민족 말살 통치를 하게 됩니다.그래서 학교에서 배우는 국어는 일본어로 바뀌고 1938년에는 아예 학교에서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 되었습니다.그리고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면서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직장생활도 하지 못하게 하였답니다.결국 1942년 한글 연구와 조선어큰사전 편찬 작업을 하던 조선어학회 사람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고 고문을 당하셨는데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사전 원고를 일본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우리 나라가 1945년에 해방을 하고 나라를 되찾은 이후에  그동안 작업했던 사전의 원고를 찾다가 포기하려던 순간 기적적으로 서울역 창고에서 원고를 찾게 되면서 결국 조선말큰사전이라는 우리 한글사전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일본이 이렇게 우리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던 큰 이유는 바로 우리말과 우리의 정신이 연결된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말이 의식을 결정한다

세종대왕님께서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고 그 뒤로 주시경 선생님의 연구를 비롯하여 조선어학회 동료들의 노력 등 한글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희생과 노력이 깃들어 있었습니다.이분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현제 사용하고 있는 과학적인 우리말도  없었겠죠? 한 민족 나아가서 한나라를 지키는데 있어서 글자의 힘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네요.외래어보다 순 우리말을 많이 사용하고 길이 보전해나가는것도 중요함을 다시 한번 깨우치게 됩니다.

 

 

 

 

우리나라 역사중 임진왜란 당시 있었던 재밌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물론 굴욕의 역사도 있지만 그중에서 선조들의 지혜와 빛을 발하는 이야기들이 너무 좋습니다. 

 

임진왜란 -도로묵이야기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임진년이 일어난 왜 즉 일본과의 전쟁을 뜻합니다.임진왜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은 아주 평화로운 시기였답니다.전쟁없이 살기 좋은 시기였지만 또한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그런데 조선과 다르게 그 시기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백여 년동안 전쟁을 거쳐서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일본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릅니다.그러고는 조선과 중국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백년동안 전쟁을 했으니 얼마나 전쟁 준비가 잘 되어 있겠습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일본 내부의 갈등을 외부와의 전쟁으로 돌리기 위해서 였다.그 시기 동북아시아 최강자였던 중국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발판이었다.또 일본안에서 전쟁을 할때 자신들를 도왔던 일본 여러  영주들에게 조선의  영토를 나눠 주기 위해서 였다 등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이유가 무엇이였든 결론적으로 일본은 조선에게 명을 침략하기 위해 조선을 거쳐서 가야 하니 그 길을 내어달라 라고 요구를 하고  부산으로 쳐들어오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됩니다.육지를 통해 빠르게 진격해오는 일본에게 조선은 속구무책으로 당하게 됩니다.결국 선조 임금님은 궁을 버리고 평안도 의주로 피난길까지 떠났답니다.그런데 전쟁중이니 아무리 임금님이어도 수라상이 부실할 수 밖에 없었겠죠? 어느 날 이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한 어부가 직접 생선을 잡아서 임금님께 바칩니다.선조 임금님은 생선의 맛을 보고 너무 맛있다고 하시면서 생선의 이름을 물으셨습니다."이 생선의 이름은 묵이옵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답니다.선조 임금은 생선의 맛에 비해 이름이 너무 하찮다고 하시며 "은어"라는 이름을 하사했답니다.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궁으로 돌아온 선조 임금은 다시 호화로운 수라상을 받았지만  묵이라고 불렸던 그때의 은어 맛이 그리워서 은어를 잡아오라고 명령합니다.그러나 다시 먹은 은어의 맛은 그때처럼 맛있지지가 않았답니다.선조 임금은 너무 맛이 없으니 "도로 묵이라고 불러라"라고 하셨답니다. 도로묵은 세월이 흐르면서 도루묵으로 발음이 바뀌였고  이 이후로 아무 소득 없이 헛수고 했을때 "말짱 도루묵이네"라는 표현으로 쓴답니다.

 

임진왜란- 이순신장군이야기

강강술래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승리를 이끌었던 이순신 장군은 일본의 2차 침입인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에 감옥에 갖히게 됩니다.이때 이순신 장군을 대신해 조선 수군을 이끈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150척이었던 판옥선이 12척이 남을 정도로 대패하면서  거의 전멸에 이르게 됩니다.이에 선조 임금은 다시 이순신 장군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하고 이순신 장군은 남아있는 판옥선 12척과 군사 120명을 이끌고 명량해전을 준비하게 됩니다.조정에서는 12척의 배로 전쟁을 하는것이 무모해 보이니 권율 장군의 육군과 합쳐서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하였는데 여기서 이순신 장군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이렇게 말씀하시고 육군과 합치지 않으셨습니다.그리고 바로 강강술래를 이용하여 적을 교란 할 작전을 짰습니다.왜군이 진격해오는 시간에 맞춰서 남자 옷을 입은 여인들을 산에 오르게 했고 거기에서 강강술래를 추었는데 왜군이 멀리서 보니 그 여인들이 손을 잡고 만든 원형 대열을 군대로 착가하게 되었답니다.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했던 강강술래,유속이 빠르고 소용돌이가 생기는 울돌목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작전 덕분에  12척밖에 되지 않는 판옥선을 가지고 130 여척의 왜군을 대파하는 큰 승리을 거둔 것이 바로 명량대첩입니다.

 

조선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 누구냐라고 물어본다면 아마 이순신장군과 세종대왕님이 1,2위를 다투지 않을까 싶네요.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빛나는 지혜로 수군의 승리를 이끌었던 이순신장군은 참으로 영웅입니다.이순신장군은 어떻게 그런 열악한 환경속에서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아이디어 또한 적재적소 적용한 부분이 참으로 지금 봐도  너무나도 용기 있고 지략이 뛰어나다 고 할수 밖에 없네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만날 수 있는 신들의 인간적인 모습이 참으로 현재의 인류사회와 비슷하다고 생각이 드네요.

오늘은 트로이전쟁과 나르키소스에 관련된 이야기 가져왔답니다.

 

토로이전쟁_아킬레스건/트로이목마/세이렌

트로이목마

 

토로이전쟁에는 결혼식을 올렸던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도 참여하게 됩니다.여기서 트로이의 왕자이자

총사령관인 헥토르를 물리치면서 최고의 활약을 하게 됩니다.아킬레우스는 트로이성문까지 돌격해 가는데 이것을 본 아폴론 신이 파리스에게 아킬레우스를 향해서 화살을 쏘라고 합니다.화살은 아킬레우스의 약점인 발뒤꿈치를 명중시키고 아킬레우스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왜 아킬레우스는 발뒤꿈치가 약점이었을까요?아킬레우스가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입니다.아킬레우스가  태어났을 때 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싶었던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스틱스강에 감갔습니다.스틱스강에 몸을 담그면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답니다.그런데 스틱스강에 담글 때 아킬레우스의 발목을 잡고 강에 담갔답니다.그래서 손으로 잡았던 발뒤꿈치 부분은 물에 닿지 않았고 그 부분이 아킬레우스의 약점으로 남아있었던겁니다.그래서 오늘날 발뒤꿈치 뼈에 있는 힘줄을 아킬레스건이라고 부르고 자기의 약점을 이야기할 때  "이 부분이 내 아킬레스건이야"라는 식으로 나의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답니다.토로이는 워낙 강한 나라였기때문에 헥토르도 죽고 아킬레우스도 죽고 등 여러 일을 10년 이상 겪으면서도 성이 쉽게 함락되지 않아어요. 이때 오디세우스라는 그리스 장군이 한 아이디어를 냅니다.이것이 바로 트로이 목마 작전,그리스군이 전쟁을 포기하고 철수한 것처럼 위장을 하고 거대한 목마 하나만 세워놓는 거예요.토로이군은 그 목마를 보고  "그리스군이 드디어 전쟁을 포기하고 떠났구나" 라고 생각을 했고  승리의 기념으로 그 목마를 성안으로 가지고 들어갔어요. 그런데 사실 그 목마 안에는 그리스 정예 병사들이 숨어 있었고 밤에 그 정예병들이 나와 성문을 열어주고 밖에 매복해 있던 그리스군이 공격하면서 토로이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맙니다.그래서 지금도 토로이 목마라는 이름을 붙인 컴퓨터 바이러스는 별일 없는 것처럼 컴퓨터에 침투해서 컴퓨터를 망가뜨립니다.또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하는 그런 존재를 의미하는 관용어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전쟁에서 이긴 오디세우스는 막대한 전리품을 챙겨서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가는 길에 여러 모험을 하게 됩니다.그중 하나가 신비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홀려 스스로 물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세이렌을 만난 일이었습니다.오디세우스는 노을 저어야 하는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만든 귀마개로 미리 막아놓아서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못하게 하고 자기 자신은 물에 뒤어들지 못하게 몸을 돛대에 묶어서 그 위기를 모면했습니다.이때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람들을 물 속에 뛰어들게 만들던 세이렌은 얼굴은 사람, 몸은 새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고 나중에는 인어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현재 유명한 스타벅스의 로고에  있는 여자 또한 세이렌입니다.세이렌이 뱃사람을 홀리듯이 사람들을 홀려 커피를 마시게 하겠다는 의미일까요? 

 

나르키소스

나르키소스

나르키소스는 강의 신 캐피소스와 물의 요정 리디오페 사이에서 태여났답니다."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한 오래 살 것이다"라는 예언을 들은 나르키소스는 너무나 잘 생겨서 그를 본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르키소스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나르키소스에게 반한 님프 중에는 수다쟁이 숲의 요정 에코도 있었습니다.평소에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말만 하는걸로 유명한 에코였답니다.이 에코가 자꾸 말을 거는 바람에 남편 제우스의 바람 피우는 현장을 놓친 헤라는 화가 나서 에코에게 남이 말하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입을 열 수 없고 말을 하더라도 남이 한 말의 끝부분만 반복하게 하는 벌을 내렸답니다.이 벌때문에 나르키소스를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에코는 불타오르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점점 몸이 사라지다가 결국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산에 가서 야호하고 소리를 지를때 들을 수있는 에코 메아리입니다.나르키소스에게 상처받은 많은 님프들은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에게 찾아가서 나르키소스도 이룰수 없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말했답니다.어느날 목이 말라서 샘물을 마시러 간 나르키소스는 갬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첫 눈에 반하게 됩니다.그것이 자기 자신의 모습임을 알지 못했던 나르키소스는 그 얼굴을 보느라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채 샘물 곁을 떠나질 못했고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나르키소스가 죽은 자리에서는  수선화가 피어올랐고 수선화의 꽃말은 "자아도취,자기애,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되었답니다.또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나르시시즘은" 지나치게 자기 자신이 뛰어나다고 믿는것,자기중심적인 성격이나 행동"을 뜻하게 됩니다.

교훈

10년동안 전쟁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트로이가 마지막 방심에 한꺼번에 몰락한 사건은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게 하네요.매사 항상 경각심?"돌다리도 두드러보고 건너자"라는 신념을 갖고 임해야 한다.

나르키소스와 에코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이든 지나친것은 좋지 않다,정도를 지키자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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